그의 무죄의 의미

며칠 전 고등법원에서 고무적인 판결이 나왔다. (기사)

기실 대기업과 권력기관의 유착이라는 한국의 오랜 전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나, 그것을 용감하게 폭로하고 나선 이들은 적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폭로의 후폭풍이 도저히 일반인에게는 감당할만한 것이 아닐 것임을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글을 통해 내가 비판한 적 있는 노회찬 진보신당대표의 1심 판결결과는 그러한 인민다수의 인식이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형사재판부의 판결문을 찾기가 어려워서,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민사재판의 판결문을 바탕으로 1심 판결의 내용을 추측해보면(어차피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이므로 거의 같은 논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노회찬이 안기부의 감청테이프 내용을 바탕으로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행위가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이 된다는 취지의 판시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가 있을 거라는 것은 당시 재판부와 검사들 빼고는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일 것이나, 어쨌든 노회찬의 폭로내용만으로는 100% 확신을 할 수가 없으니 제대로 된 입증도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유포해서 고결하신 검사님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참 우스운 이야기인 것이, 해당 재판이 떡값검사가 피고인이 되어 뇌물죄의 책임을 묻는 자리였다면 무죄추정의 원칙 하에 명확한 증거를 요구했어야 할 일이겠지만, 폭로한 노회찬의 허위사실유포 여부를 묻는 재판에서 애초에 재판부가 피고인도 아닌 검사측의 무죄를 예정해놓고는 피고인에게 '증거불충분으로 유죄(?!)'라는 황당한 판결을 해버렸던 것이다. 재판부가 이렇게 안성맞춤으로 판결을 해주면 검사측에서야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재판에 임할 수 있겠지만, 정작 '권력형 비리 사건의 수사를 촉구'하기위해 폭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리 증거까지 다 수집해놓고 확실한 준비를 해놓지 않고서는 어차피 명예훼손죄가 될 뿐이므로 결코 폭로를 해서는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만다. 아니, 애초에 폭로할 사람이 증거까지 다 수집해서 확실하게 사실을 만들어놓고 폭로를 해야 한다는 식이라면 검찰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사실은 그렇다. 판결을 미리 예정해놓고 근거를 끼워맞추려다보니 저런 이상한 논리구조가 도출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이다 보니 2심 재판부에 대해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게 전개되었다. 고등법원은 단순히 노회찬의 혐의를 부정한 것 뿐 아니라, 판결문 말미에 '검찰은 실제로 삼성그룹으로부터 금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을 해태했다'라고 씀으로써, '어차피 재판은 맞춤으로 될테니 날로먹으려 드는' 검찰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가하기까지 한 것이다. 검찰이 판결문을 보고 느꼈을 황당함을 생각하면 약간 통쾌하기까지 하다. 한편인 줄 알았던 법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테니까.

2심재판의 핵심적인 판결내용은 말하자면 '허위사실 유포를 통한 명예훼손'에 있어 '허위사실'의 입증에 대한 책임을 1심과는 거꾸로 해석한 것이다. 1심에서 폭로내용이 허위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검찰은 전혀 입증할 필요가 없이 애초에 법원이 허위사실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2심에서는 노회찬의 폭로내용이 허위사실이라는 점을 검찰이 충분히 입증했어야 한다는 식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허위사실이 아니라면 명예훼손죄의 특수한 위법성조각사유-공익을 위한 행동-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론에 놀라워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다는 점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이에 더해 2심 재판부는 해석에 법관의 재량이 크게 작용하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부분에 있어서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행위가 '면책특권에 해당'한다고 판시함으로써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으로서의 국회의원이 인민의 알권리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주기도 하였다.

물론 검찰이 당연하게도(?) 상고를 선언했고,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까닭에, 적어도 현시점에 노회찬의 무죄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그의 명예훼손과 면책특권을 남용했다는 혐의가 벗겨졌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힘있는 자들의 구린 뒤를 캐내서 폭로하는 용기있는 행동을 한 이들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해버리던 지난날의 관행에서 조금은 벗어나, 용기있는 이들을 감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고를 선언한 검찰측은 "명예훼손죄와 면책특권을 이번 판결처럼 판단하게 되면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는 사건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에게는 다소 기분나쁜 일일 수 있을지 모르나, 정말 그러하다면 이후 권력형 비리에 대한 폭로가 명예훼손죄로 처벌될 걱정없이 터져나올 가능성이 더욱 증가할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검찰의 아쉬움과는 별도로 국민일반에게는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권력과 기업의 유착관행에 있어 작은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지만, 이번 판결은 정치인 노회찬 개인과 진보신당, 더 나아가 한국의 좌파 정치세력의 성장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돈안드는 훈수두기 좋아하는 분들께서 공공연히 들고나오는 '피선거권이 박탈될테니 선거에 완주할 수 없을거다'는 식의 발목잡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어떤 자리에 올라서서도 이시대 최대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과는 맞설 용기도 의지도 없으면서 재판결과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밉살스런 이들이 이제는 더이상 그런 식으로 떠벌릴 수는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뿐만아니라 이번 판결은 이후의 지방선거에서 노회찬과 진보신당이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혹은 그 이전의 시기부터 노회찬을 잘 알고 그의 행적을 지켜보던 이들이야 노회찬에 대해 농담으로라도 '당신도 똑같은 정치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지만, 그에 대해 잘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알아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교적 최근에 노회찬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에게도, 정치에 별 관심없던 사람들에게도 '노회찬이 이런인물이다' 혹은  '진보신당이 이런 정당이다'라고 제시할 훌륭한 타이틀을 법원으로부터 획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떡검과 삼성에 맞서 정면으로 도전한 유일한 정치인'. 자칭 진보라는 대통령조차도 거대자본의 힘 앞에서는 그저 고개숙일 뿐이었던 현실에서 이 사회의 가장 강고한 기득권에 정면대결을 시도했던 정치인이라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지가 되지 않겠는가.

큰 변화도 처음에는 작은 곳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의 보다 큰 변화를 이끌어낼 작은 단초가 되기를. 이 사회의 변혁을 책임질 정치세력의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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